요즘 애들(앤 헬렌 피터스)50대 은퇴자의 경제적 자유

미국 밀레니얼 세대의 번아웃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다음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시기적으로는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를 이야기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두 자녀가 모두 밀레니얼 세대 끝자락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큰 아이는 졸업 후 취업을 해서 사회 초년생으로 지내고 있고 둘째는 졸업 후 취업준비생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죠.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과 우리의 현실이 많이 비교되는 것도 있었고 사실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현재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다면 그들의 젊은 세대가 겪는 번아웃에 대한 내용은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모든 미국 사회를 대변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어두운 면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고 그 어둠이 오히려 우리가 겪는 고통 보다 작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경험과 수 많은 또래 밀레니얼들을 인터뷰하면서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들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야기 합니다.
망가진 것은 밀레니얼 세대만이 아니라 체제 자체이며 역사적으로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이번 밀레니얼 세대는 이런 흐름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겪는 번아웃 증후군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모든 것을 가져간 후에 등장한 밀레니얼 세대는 온갖 부당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밀레니얼 세대 중에서도 백인 중산층과 흑인, 히스패닉, 유색인종 간의 격차도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이전 세대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 중 중산층이며 지식인들은 전체의 20%를 차지하지만 그들은 정책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지난 성장에서 겪었던 진보주의를 잊고 다음 세대 도는 같은 세대지만 계급을 달리하는 하층민을 자신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높은 계급에서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와 그에 뒤따르는 사회적 굴욕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급 하향 이동에 대한 두려움과 이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모든 정책 결정에서 계급 이동 사다리를 거두어 들이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삶의 바탕에 깔린 계급 지위에 대한 초조함을 처리하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줄 직업을 찾으며 고군분투하는 것이 번아웃의 형태입니다. 매일 불안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에 따르는 정신적 대가는 존재하죠. 이게 밀레니얼의 번아웃과 무슨 상관일까요? 중산층 부머들의 번아웃 상태는 그들이 그나마 통제할 수 있는 존재에 더욱 전념하게 만들었고 그 존재는 바로 그들의 자녀 밀레니얼 세대인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바쁜 일과로 돌봄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심해진 베이비부머 세대는 육아를 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많은 학습과 과외활동을 제공햇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냥 쉴때 죄책감을 느끼는 상태에 이릅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자유스럽게 자라난 밀레니얼들은 자연과 친하고 보다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덕분에 번아웃을 피할 수 있었죠. 유년기의 바쁨과 현재 느끼는 피로, 수치심, 번아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그들이 누렸던 중산층의 지위에서 하향이동하는 것에 대해 무척 민감합니다. 한번 추락하면 다시는 올라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사태를 막기위한 자구책으로 더 열심히 더 잘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은 자격증을 가지고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더 한가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능한 한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넣으려고 노력하죠.
한국에서의 열정페이 현상이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똑같이 발생한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희망노동이라고 저자는 표현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열정을 볼모로 한 노동착취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런 희망노동을 떠받치는 논리가 소명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초기 계율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직업을 모든 사람이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후 칼뱅주의는 소명에 대한 헌신이 선택받은 자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해석했습니다. 막스베버는 이런 해석이 모든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을 단지 넓은 관점에서 의미 있을 뿐 아니라 가치 있는 것으로 신성한 것으로 장려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조장했다고 주장합니다.
노동자의 노동 = 신의 선물 = 소명 = 최선을 다함 = 신성한 가치 = 모든것을 감수 = 자본주의 횡포의 밑거름
일을 일로 말하지 않고 열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말할때 불합리가 발생한다. 일은 그저 일이죠.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말을 많이 듣죠. 저도 사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일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구닥다리 일(전기공, 배관공, 우편배달부 등)일에 매력을 잃게 됩니다. 매력 없는 일도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다보면 이런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겠죠. 앞으로 우리는 또는 밀레니얼은 일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더불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에서 제일 높은 급여를 주면서 5시 이후에는 퇴근이 가능한 직업을 찾는 것으로 말이죠.
요즘 프레카리아트(불안정을 뜻하는 precarious와 노동자 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로 불안정한 노동자를 뜻합니다)라는 용어가 유행입니다. 임시직, 파견직이 고용시장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97년 IMF 이후에 급속하게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었습니다. 어느 통계를 보면 현재 일자리 중 약 40% 정도가 비정규직 일자리라고 하니 노동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안정한 고용시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프레카리아트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우버운전자, 소매점 종업원, 아마존 창고직원, 시간강사, 프리랜서, 인스타카드(장보기 대행앱)쇼퍼, 기업 청소부, MTV 프로듀서, 재택요양 보호사, 마트 점원 등이 있습니다. 찾아보면 더 많은 직업들이 프레카리아트로 분류되겠죠. 그 반대 용어로는 살라리아트 즉 정규 월급을 받은 정규직이 있습니다.
요즘 애들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선진국인 미국의 민낯울 들여다 본 기분이었으며 그와 비추어 우리나라의 현실도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정규직 진입을 위해 지금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노력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회가 좀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추구할 수 있도록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